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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반일 항쟁, '6.3항쟁'

by momentoushistory 2023. 6. 3.
6.3항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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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에 일어난 6.3 항쟁은 한국의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6.3 항쟁은 박정희 정부가 한일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한 사건이었는데요.

당시 정부는 한일협상을 조속히 타결하려 했으며, 일반 여론의 추세를 무시한 채 3억 달러의 청구권 보상으로 만족하면서 한국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대해 국민들은 불만을 표출하며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당시 절정에 이른 한일국교 정상화 회담 반대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였습니다.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부는 한일 협상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 계엄령은 그 해 7월 29일에 해지되었으며, 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른 박정희 정부에 반발하여 재야 세력이 총궐기하여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준비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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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죄로 끌려간 시위 참여자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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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항쟁에 대한 평가

 

당시 정부는 여러 나라와 수교하려는 목적이 컸었는데요. 1961년에 소련북한중국이 전쟁 재발 시 군대의 자동 개입이 담긴 '동맹 조약'을 체결하자 이러한 구도 하에서 한일 양국이 안보적으로 협력하라는 미국의 물밑 접촉, 압박이 있었으며, 수교 과정에서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일본 인맥도 작용했습니다.

당시 도시의 실업률이 30% 일 정도로 농산물 판매가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정부는 일본과의 수교를 통해 한국의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과 일본의 우수한 기술력을 결합하면 해외시장에 경쟁력 있는 공산품을 수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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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수교가 체결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국민들의 반일 의식이 전면에 드러나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 문화 잔재를 청산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져 한국 내에서의 일본 문화 등에 대한 배척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일본 잔재 청산 노력 등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